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의 전쟁범죄 (문단 편집) == 한국인 및 아시아 각국 [[강제징용]] 노역 == [[태평양 전쟁]] 중기가 되면서 한국인들을 강제징용에 동원했는데, 태평양 전선에서는 태평양 해군기지 건설, 내지에서는 석탄 다산지에서의 탄광업, 탄약 및 무기 부품 제조에 동원했다. 1947년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라는 문건에 따르면,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한국인 징용자는 총 612만 6,180명으로, 당시 한국인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 강제로 징용되었다.[* 물론 복수 징병도 포함되었기에, 이보다 수가 적을 가능성이 있다.] 징용된 인원들 중 한반도 안에서 강제징용을 당한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였지만, 약 15만 명의 인원이 강제로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석탄 채굴 등의 강제 노동을 해야 했으며, 심지어 사모아와 같은 적도 근처에 있는 섬까지 한국인들이 강제징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대우는 [[아우슈비츠]]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매우 박했고, 반항자나 굶어죽거나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이 생기면 갱도 구석에 몰아다가 불태워버리는것은 기본이었다. 징용된 한국인들은 일본, 남양 군도[* 하근찬의 수난이대에서 만도가 끌려간 곳이다], 버마, 사할린으로 끌려가 탄광, 군수공장, 토목공사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으며, 엄청나게 강도 높은 강제노동과 구타로 한국인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갔다. 일본은 공사가 끝난 평양 비행장의 공사장에서는 보안 유지를 이유로 한국인 징용노동자 800여 명을 집단으로 [[학살]]했고, 지시마 열도에서도 5,000여 명의 징용노동자를 역시 기밀누설 방지라는 이유로 학살했다.[* 전략적인 이유로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미군에 협조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경우 재미로 학살했다는 것을 목격했다고 양심 선언을 한 일본군 병사들도 있었다.] 남양 지방의 섬에 끌려간 한국인의 경우에는 일본군이 후퇴하자 한국인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 무참하게 학살당했으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당시에는 광산 노동 중 수많은 한국인이 사망했다. 또한 맛있는 고기라면서 무언가를 대접했다는데 그것이 죽은 동료의 [[인육]]이었다는 것이 이쪽 생존자 증언담의 클리셰 중 하나이다. 이 경우 [[밀리환초 학살사건]]에서 실제로 이런 증언이 나왔다. 물론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및 전쟁포로들은 강제 노역을 했다. [[중국인]]의 경우 4백만 명 가량이 강제징용을 위해 동원되었고. 강제징용된 사람들은 [[미쓰비시 그룹|미쓰비시]] 등 기업들이 운영하는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하거나 일본군 밑에서 노역을 했다. 약 4백만 명의 강제징용자들이 일본군 밑에서 강제 노동을 하였는데, 물론 노동은 무척 고된 작업이였고 10만 명의 포로들이 [[미얀마]]에서 철로 건설 중 사망했고, 다른 일본군의 점령지로 전출된 27만 명의 [[인도네시아인]]들 중에서 고작 5만 7천 명만 살아 돌아왔다. [[대만]]도 마찬가지라서 86만 명이 넘는 강제징용자가 끌려나가사 40만 명이 살아오지 못했다. 그밖에도 대만 원주민들도 12만 명이 끌려나가 절반은 돌아오지 못했다. 더러는 이들은 유럽 전선까지 끌려나갔다. 게다가 일본군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병력이 부족하게 되자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쓰기 위해 한국인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나갔다. 그렇게 학도병제와 징병제 등으로 21만 명의 한국인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나갔고, 그 대다수가 총알받이가 되어 전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